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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스쿨 데이즈!


캐이댄스는 선셋 방의 회색 소파 위에 앉아서 셀레스티아가 내어 준 주문식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비록 사랑이 캐이댄스 공주의 재능이긴 했어도, 원래 페가수스였던 만큼 머리 위에 새로 생긴 뿔은 아직 생각만큼 캐이댄스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진 않았다.


물론, 이모님에게 이젠 염동력이나 단순한 빛내기 주문보다는 더 어려운 주문을 배우고 싶다고 제 입으로 직접 말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모님이 내 주신 주문은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위험부담도 컸다. 까딱 잘못하면 사랑은커녕 병적인 집착만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주문이었다. 게다가 설명이 복잡하기는 또 어찌나 복잡한지.. 


하긴, 푹신한 소파 위에 배를 깔고 편히 누워있는데야 집중이 될 리가 없지.. 모로 봐도 이건 제대로 각 잡고 공부하는 포니의 모습은 아니었다.


어쨌든 주문식이 엄청 복잡하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어서, 캐이댄스는 짜증 섞인 신음소리를 한 번 내고 책을 소파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끙.. 한참 필요할 때 선셋 걘 어디 있는 거람?"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사랑의 공주는 쿠션에 턱을 괴고 완전히 누워버렸다.


선셋은 짤막하게 아침을 먹은 뒤 급한 공무가 있다며 재촉하는 이모님의 발에 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후 한참동안 캐이댄스는 선셋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분명 두 포니의 유사모녀 관계가 회복된 것은 잘 된 일이지만. 나 참.. 선셋의 빈 자리가 이렇게 크게 느껴질 줄이야..


그리고 최근 들은 소식도 엄청 신경 쓰였다. 사랑을 먹는 변신충 군단의 탈옥이 사랑의 공주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는 안 봐도 뻔하리라. 실제로 캐이댄스의 잠자리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언제나 편치 않았다. 꿈을 꿨다 하면 꼭 변신충에게 납치당하는 악몽이었으니, 제대로 잠을 자기도 힘들었다.


덜컥 하는 소리가 갑자기 들려와 한참 변신충들 생각 중이었던 캐이댄스는 소스라치게 놀라 두 날개를 활짝 펴 날아갈 태세를 취했다. 방 안으로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오만상을 쓰고 있는 선셋이었다. 선셋은 잠깐 동안 멀뚱하게 캐이댄스를 한 번 쳐다보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나 한 번 두런거린 뒤 날개를 편 채로 굳어있는 캐이댄스에게로 다가왔다.


".. 너 여기서 뭐 해?"


캐이댄스는 유심히 선셋의 기분을 살폈다. 미묘하게 떨리고 있는 날개와 약간 찌푸린 얼굴,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하다는 신호였지만, 그렇게까지 심각하진 않은 것 같았다.


"뭐 하나니? 너 기다렸지."


사랑의 공주는 대답했다. 2시간째 기다리는 중이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겠군..


"그나저나 어디 갔다 온 거야?"


선셋의 표정이 다시 짜증으로 한껏 구겨졌다. 방 한 가운데에 놓인 자신의 큐티 마크가 뜨개질된 카펫 위에 선셋은 벌렁 드러누웠다.


"어머니가 어제 그러시더라. 네가 변신충이 아니란 게 증명되었으니, 이퀘스트리아의 언론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열어 그 사실을 공표해야 한다고.."


"아침 먹고 바로?" 캐이댄스는 선셋의 방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오후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회견 끝난 다음엔 뭐 했는데?"


힐난하는 눈빛으로 선셋은 캐이댄스를 쏘아보았다.


"방에 돌아와서, 너 여기서 뭐 하냐고 물은 뒤에, 방바닥에 쓰러지신 참이다. 왜?"


"잠깐-"


"직방으로 회견을 27회나 논스톱으로 하고 왔다고! 세상에! 이퀘스트리아에 이렇게 신문사가 많았는지 난 오늘 처음 알았다."


"어...그..그래도, 재밌지 않았어?"


분명 캐이댄스도 오늘의 선셋처럼 캔틀롯 타임스라는 신문사의 기자들과 회견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게 캔틀롯에 온지 얼마 안 됐을 때였던가..


"난 재미있었는데.. 기자 분들도 친절했고.."


캐이댄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셋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이까지 부득부득 갈고 있었다. 확실해. 내가 뭘 잘못 말했구나..


"아~ 그러셨어요? 그거야 네 인터뷰가 대략 이런 내용이었으니까!"


선셋은 목청을 가다듬은 뒤 달달하다 못해 오그라들 정도의 비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머나아~ 캐이댄스 공주니임~ 강아지 좋아하세요오? 공주니임~ 아이스크림 어떤 맛 좋아하세요? 앗! 공주님! 설마... 마음에 두고 계신 분이라도? 꺄르르륵!"


"반대로 난 어땠는지 알아? '선셋 쉬머 공주님! 그리폰스톤에 보낼 지원금 명목으로 해마다 소모되는 세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셋의 목소리는 이제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는 기자의 톤으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공주님을 변신충이라는 명목으로 기소한 스트롱 위더스의 처우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캔틀롯 정부 요직으로 침투한 변신충이 있다는 루머에 대해 공주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이퀘스트리아의 교육 제도 개선에 대해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수제자로써 한 말씀 해주세요! 라고 기자들이 아주 한꺼번에 날 들들 볶아대더라니까? 아니 진짜! 옛날엔 알리콘이 되면 초월적인 마력도 얻고 권력도 없고 참 좋겠다 싶었는데, 겪어보니까 그런 것도 아니더라! 대체 뭐가 좋아서 내가 알리콘이 되려고 했을까? 응?"


선셋이 잠깐 숨을 고르는 동안 캐이댄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다른 포니들이 널 진지하게 생각해주긴 하는구나.."


사랑의 공주는 약간 화가 났다. 질투심? 아마도 그럴 것이다. 다들 선셋 쉬머 공주의 존재를 이모님만큼이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캐이댄스의 존재감과 무게감? 다른 두 포니에 비하면 바닥이나 다름없었다.


"흥! 아까 한 헛지랄을 다시 한 번 하느니, 차라리 너랑 몸을 바꿔서 조용히 살고 말지.."


탁 뱉듯 대꾸하며 선셋은 캐이댄스가 누워있는 소파 앞으로 다가왔다.


"그나저나, 뭣 때문에 내 방에 온 거야?"


이제 선셋은 캐이댄스가 가지고 온 책의 제목을 살피고 있었고, 캐이댄스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그게.. 마법 배우는 데 도움을 좀 받을까 해서.."


"윽." 


약간 투덜거리면서도, 선셋은 캐이댄스가 가져온 마법책을 마력으로 들어 올려 보기 시작했다.


"흠.. 여기에 실린 감성 충만 마법들은 나도 잘 못 쓰는데. 주문의 복잡함에 비해 신뢰성도 그닥이고.. 사랑 마법중 내가 그나마 잘 쓸 수 있는 주문이 '내거거든.' 주문이거든? 촉이 딱 오지? 하. 하. 하. 참 좋~은 추억이었지.."


캐이댄스도 몇 시간 전 직접 써봤었으므로, 그 주문의 흉악성에 대해선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셀레스티아 이모님이 마침 그 자리에 없었다면 오렌지 하나를 두고 왕궁 관리 마원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을 게 뻔했으니까.. 그리고 선셋의 어투로 봐선 선셋은 아마도 그 주문을... 아니, 신경 쓰지 말자. 선셋은 이제 새 포니가 되었는걸. 무슨 난리가 벌어졌는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그게 아니라.. 있잖아 선셋. 사랑 마법 말고도 또 다른 계통의 마법을 배우고 싶어서 그래."


선셋은 얼굴을 찌푸렸다.


"기본 염동력을 숙달하고 이제 재능에 관련된 마법으로 갓 넘어갔는데 갑자기 재능 외 계통의 마법을 먼저 배우고 싶다고? 으.. 이거 기본 중 기본만 배운다고 치더라도 일주일은 족히 걸릴 텐데... 아, 물론 안 도와주겠다는 말은 아닌데, 그래도 기왕 배울 거면 차근차근히 재능 관련 마법으로 기초를 다지고 그 다음에 배우는 게-"


"안 돼! 시간이 별로 없단 말야!" 선셋의 말을 끊고 캐이댄스가 버럭 외쳤다.


어느 새 선셋의 표정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다. "...뭐..뭣?"


약 3초 동안 캐이댄스는 화재를 돌릴까 말까 망설였지만, 곧 한숨을 쉬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변신충 때문이야.. 물론 이모님이 알아서 방지 대책을 잘 세우시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무서운 걸 어떡하라고? 난 사랑의 알리콘이잖아! 변신충들은 사랑을 먹고! 결국 그 놈들이 통째로 날 잡아먹겠다고 벼르고 있는 거 아냐! 제 1순위 목표가 바로 내가 될 게 분명하다고!"


"어.."


공황상태에 빠진 캐이댄스를 달래주기 위해 선셋은 잠깐 머리를 굴렸다.


"사실.. 어머니 말씀을 들어보니 변신충의 제 1 목표는 내가 될 것 같던데.. 변신충 여왕인가 뭐시긴가가 어머니에게 제대로 복수하려면 아마도 딸 격인 날 이용할 것 같..."


선셋은 얼굴을 찌푸리고 땅을 한 번 쳐다보았다. "쉽게 이런 생각부터 떠오르다니.. 무지 소름끼치네! 정말.."


"그 변신충들도 머리가 있는데 강력하고 난폭한 알리콘에게 날 잡아 잡수쇼 하고 대놓고 덤빌 것 같아? 아니지! 그 알리콘의 가장 친한 친구로 위장해 방심한 순간 그 등을 찌른다면 또 모를까.."


캐이댄스가 방금 속으로 생각해낸 이 시나리오 때문에 캐이댄스의 공포는 더 가중되어가고 있었다.


"나도 엄밀히 이퀘스트리아의 수호자가 될 몸이긴 하지만... 난 이모님이나 너 같지 않은걸! 너는 이미 다년간의 마법 공부를 한데다가 공주도 되기 이전부터 이미 알리콘인 날 마법으로 몇 번이나 골탕 먹였잖아! 그에 비해 난 뭐야? 갑자기 뿔이 생겨서 상경한 촌년 주제에, 꼴에 공주라는 직위를 달고 있긴 하지만 결국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물건을 둥둥 띄우는 것 밖에는 없잖아!


이상한 느낌이 들어 아래를 내려 본 뒤에야 캐이댄스는 자기가 사지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숨을 쉬었다. 선셋을 볼 낯이 없었다. '나. 이러고도 공주 자격이 있긴 한 걸까..'


"우와..." 선셋은 떨고 있는 캐이댄스를 자신의 발굽으로 어루만져주며 말을 이었다.


"정말 걱정 많이 하고 있나 보구나."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난 뒤, 캐이댄스는 부끄러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선셋을 쳐다보았다.


"내가 그렇지 뭐.. 언제나 숨고.. 망설이기만 하고.."


선셋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 이건 웬 쌩 양아치 유니콘이 널 괴롭히는 거에 비하면 심각한 문제잖아. 충분히 그럴 만도 해.."


한숨을 뱉으며 선셋은 말했다. 몇 초 뒤 선셋의 표정엔 좀 더 심각한 기운이 어렸다.


"그래도 걱정 마 캐이댄스. 넌.. 내.. 그... 가장 친한 친구니까.. 그 어떤 새끼도 네 몸에 손.. 아니, 발굽 하나 까닥하지 못하게 하겠어."


들으니 안심이 되는 말이었지만, 캐이댄스는 그 발언에서 논리적 오점 하나를 발견해낼 수 있었다.


"네가 내 주변에 없으면 그 땐 어떻게 하고?"


"그럼 지금부터 계속 붙어있으면 돼지. 오늘 밤 내 방에서 같이 자는 거 어때?"


선셋은 시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캐이댄스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물론 캐이댄스는 선셋이 자기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는 것 정돈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제 침대 밑에서 괴물이 덮칠까봐 혼자서 잠에 못 드는 어린 망아지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는 게 영 맘에 안 들긴 했지만, 그 괴물은 엄연히 실존하며, 또 언제 나타날지도 몰랐으므로, 캐이댄스는 위험부담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캐이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선셋은 뿔에 마력을 집중하여 벽난로에 불을 붙인 뒤, 염동력으로 소파에 누워 있는 캐이댄스를 들어 침실로 데려가 그 곳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녹색 침대보에 쌓인 침대 앞으로 걸어와 잠시 캐이댄스를 돌아보며 예를 갖추어 목례를 했지만, 그 속에는 지울 수 없는 장난기가 느껴졌다.


"가실까요? 공주님?"


"어마! 고마워요 공주님."


선셋의 장단을 맞춰주며 캐이댄스는 침대 위로 올라와 폭신한 침대보에 몸을 묻었다.


캐이댄스가 침대 위에 올라온 뒤 곧바로 선셋이 그 뒤를 따라 자신의 침대 위에 올라왔다. 선셋은 새로 얻은 날개와 두 앞다리를 활짝 열어 사랑의 공주를 침대 위에서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어... 아무래도 이거, 너무 붙었지? 두 알리콘이서 자기엔 침대가 너무 좁네.. 침대에서 안 떨어지려면 이렇게 바짝 붙는 수밖에 없겠다. 미안."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캐이댄스는 선셋의 등을 자신의 두 앞다리로 감쌌다. 선셋의 품에 더 파고들기 위해 몸을 꼼지락거리기까지 했다.


"미안하긴.."


고개를 기울여 선셋의 목 쪽에 자신의 얼굴을 묻으며 캐이댄스는 말을 이었다. "완벽한걸 뭐.."


가장 친한 친구의 품에 안겨, 캐이댄스는 가만히 눈을 감고 선셋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강하지만, 듣고 있다 보면 묘하게 진정이 되는 소리였다.


짧은 시간 내에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캐이댄스가 항상 두려워했던 포니가 지금은 캐이댄스를 괴물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다.


선셋은 캐이댄스를 더 꼭 껴안았다. 더 안심이 되었고, 더 기분이 좋았다. 딱 붙은 선셋이 몸이 약간 쭈뼛쭈뼛하는 걸 볼 때, 선셋은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됐다. 지금은 그냥 신경 쓰지 말자. 늦은 밤이기도 하고..


"야.. 캐이댄스..." 하지만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건넨 건 오히려 선셋 쪽이었다.


"왜?" 사랑의 공주는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대답했다.


"그..."


선셋은 과연 이 말을 해도 될까 하는 눈치였다.


"..변신충 때문에 말인데.. 너무 크게 걱정하지는 마. 그놈들이 무슨 일을 꾸미든 간에, 넌 잘 이겨내고 멋진 공주님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캐이댄스는 활짝 웃긴 했지만, 속으론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모님 같은 훌륭한 지도자의 발끝이나마 따라가려면 적어도 수년은 족히 걸린다는 사실을..


"에이~ 맘에도 없는 소릴-"


"그런거 아냐. 너 속 편하라고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고. 네가 훌륭한 공주가 된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봐서 하는 말이야."


선셋은 여기에서 말을 멈춰버렸다. 몇 초 동안 캐이댄스는 멍하게 선셋만 쳐다보았다. 우와...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미처..


"?.. 그게 무슨 소리야?"


선셋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캐이댄스의 귀에도 들릴 지경이었다.


"전에. 내가 거울에 관해 이야기해준 거, 기억나?"


한 마디 한 마디마다 굳은 각오를 담아 선셋은 말했다.


"음.. 거울이 보여준.. 환각 말하는 거지 지금?"


미적미적 캐이댄스는 대답했다. 선셋이 처음으로 자기가 거울에서 본 것을 거의 자발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그 전까진 그냥 물어본 것만 답해주는 수준이었는데..


선셋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셋의 턱이 캐이댄스의 머리 위에 살포시 닿았다.


"아...응... 그거..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보아 할 때, 그걸 단순한 환각으로 치부하기는 좀 섣부른 판단인 것 같고.. 여전히 좀 애매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윽! 어쨌든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고!"


한숨을 한 번 쉰 뒤 선셋은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내가 그 때 이퀘스트리아에 한 번 돌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난 인간 세상에서 가져온 모조 왕관을 조화의 원- 아 미안, 지금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군. 그래.. 어쨌든 이퀘스트리아로 돌아온 적이 있는데, 마침 도착한 곳이 크리스탈 왕국이었단 말이지?"


잠깐 고개를 갸웃 하며 캐이댄스는 곁눈질로 선셋의 눈치를 주도면밀하게 살폈다.


"그..그렇구나.."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긴 하지만.. 혹시 시간 여행이라도 하고 온 건가? 만약 그렇다면 미래의 일을 함부로 듣게 되는 건 위험한 일이 아닐런지.. 캐이댄스는 걱정이 약간 앞섰다.


"크리스탈 왕국은.. 네가 다스리는 나라였어. 변신충이 아무리 설쳤어도 넌 결국 살아남았단 이 이야기지. 그리고 내 생명을 걸고 보증하는데 넌 분명 좋은 공주님이 될 게 당연하니까 너무 자학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고작 되바라진 말 새끼 하나가 천년 묵은 알리콘에게 뭘 좀 배웠답시고 네 앞에서 신나서 몇 주간 깝쳤기로서니, 풀 죽을게 또 뭐가 있어? 넌 그것보다는 훨씬 대단한 사람... 아니, 포니인걸."

 

확실히 안심이 되는 이야기기는 했지만,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있었다.


"그럼 넌 더 이상 그 일들을 환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캐이댄스는 인상을 약간 찌푸리며 재보는 눈으로 선셋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100퍼센트 확신은 못 하겠지만.. 일단 내가 두 번째로 거울에 들어갔을 때 일어난 일 만큼은 진짜로 일어난 거라고 자신할 수 있어. 거기에 크리스탈 왕궁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 까지 포함해서


선셋에게 집중했던 시선을 떼며, 캐이댄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선셋의 이 말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던 까닭이었다. 시간 여행이 연관된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의 진위여부를 따지자니 머리가 아파왔다. 그리고.. 미래의 일을 미리 알게 된 이상, 앞으로 어떤 결과가 뒤따를지 예측하는 것도 힘들었다.


실제로 겪은 기억인가, 아니면 거울이 또 시간을 거스른 환각을 보여준 건가? 하긴..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한가?


일단 지금 중요한 건, 캐이댄스가 지금 가장 친한 친구의 품에 안겨 깊은 밤 동안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 하나 뿐인데..


"...무슨 일인지 분석이 다 끝나면 나중에 나한테도 좀 쉽게 풀어서 설명해줘. 난 알았지? 양자 역학의 '양' 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지끈해지는 포니니까.."


"하하.. 그럴게."


"그럼 잘자 선셋."


"너도, 캐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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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이댄스는 당초 선셋과 함께 학교로 날아갈 생각으로 여유 있게 아침에 선셋을 깨웠다. 선셋의 날갯짓은 기상재해를 일으킬 정도로 영 몹쓸 레벨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말이다.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선셋은 먹는 둥 마는 둥 밥을 먹고 책가방을 매고 왕궁 대문을 나섰다. 일요일 날에 포니를 들들 볶는 기자회견이란 거한 인내심 테스트를 거쳤던지라 책가방을 쌀 여유 따윈 없었지만, 다행히 한 수 앞을 내다본 어머니의 혜안으로 매고 갈 책가방은 말끔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앞으로 15분. 선셋은 질주했다. 가로막는 장해물과 포니들을 가로지르고, 뛰어넘고, 몸을 숙여가며 쓱쓱 피했다. 선셋은 왜 진작 순간이동 표식을 학교에 걸어두지 않았는지 자기 자신의 멍청함을 탓했다.


아슬아슬하게 스쳐간 수레만 해도 벌써 3대, 심지어 양배추를 가득 실은 수레 한대는 선셋과 부딪히자 아주 박살나 버렸다. 수레 주인에게 나중에 변상하겠다고 급하게 말한 뒤, 다시 통학로를 고속으로 질주했다. 다행히 어스 포니의 인내력과, 페가수스 마력의 충돌 완화 기능 덕분에 심하게 힘들거나 아프지는 않았다. 가벼운 숨을 몇 번 몰아 쉰 뒤 선셋은 학교를 올려보았다.


캔틀롯 고등학교.. 선셋이 인간 세상에서 예전에 다니던 곳.. 아무리 다른 차원의 이름만 같은 다른 건물이라고 하지만, 외관상으로는 중세시대의 성 테마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3층짜리 건물인 점까지 소름끼치도록 똑같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인간 세상의 체육관은 아주 현대식 디자인의 시설인 반면, 이퀘스트리아의 체육관은 학교 본관처럼 고전적인 디자인이었다는 거랑, 그 체육관이 인간 세상의 2배 정도는 넓었다는 것. 그리고 거대한 시계탑이 학교 정면에 지어져있다는 것뿐이었다.


그걸 제외한 모든 게 선셋의 눈에는 너무나 낯이 익었다. 그러니 이제 갑작스레 이퀘스트리아에 귀환해 생긴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들은 잠시 잊고, 다시 되찾은 고등학생의 단순하고 평범한 삶을 조금이나마 즐겨볼 생각이었다.


'캐이댄스가 자기는 먼저 갈 테니 교장실 앞에서 만나자고 했었지..'


이렇게 생각하며 선셋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학교 정문으로 걸어간 뒤 선셋은 마력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만, 교장실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이정표 같은 것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대단하구만.."


투덜거리면서 선셋은 현관을 중심으로 각기 세 방향으로 뚫린 복도들을 두런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최소한 입구에 여기가 어딘지, 뭘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지도라도 놔둬야 되는 거 아니냐고! 사람 열받- 아니 포니 열받게 정말.."


금속성의 캐비닛 여는 소리(세상에.. 이 소리마저도 귀에 익었다.)가 들려 선셋은 그 쪽을 쳐다보았다. 왼쪽의 A라고 써진 곳에 놓인 사물함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거기엔 둔부 쪽에 활짝 웃는 꽃들이 그려진 자주색 털가죽의 어스 포니 한 필이 사물함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으.. 어디에다 뒀더라.."


"저기.. 미안한데, 지금 괜찮지? 뭣좀 물어봐도 돼?"


선셋은 아주 다소곳한 어조로 눈앞의 암말을 불렀다.


뒤적거리는 소리고 순간 멈췄다. 눈앞의 암말은 사물함에 박고 있었던 머리를 빼고 엉덩이께로 앉으며 선셋을 쳐다보았다. 다른 포니가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으...응?"


익숙한 목소리.. 선셋은 경악했다. 갈기 스타일은 다른데.. 달라도 엄청 다른데.. 심지어 쌍팔년도에나 유행할법한 발찌를 차고 있어 평소 이미지와도 완전 다르긴 했지만.. 저건 분명 치어릴리.. 치어릴리 선생님이었다. 저 촌티 나는 모습도 과거 치어릴리 선생이 자기 왕년의 모습이라고 찍어놨던 사진의 모습과 아주 무섭도록 쏙 빼닮았다!


"치-치어릴리 선생님?!"


선생님? 눈앞의 암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혹시 나 아니? 내 이름 치어릴리는 맞는-"


치어릴리는 턱을 떡 벌리고 있는 선셋과 아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허억?! 아... 알리콘?!"


"아이고.. 음... 알아줘서 고마워. 진짜 별 거 아니지만.."


최대한 냉소적인 어조가 안 드러나게끔 선셋은 담담하게 말했다. 첫인상(?)이 나빠 봤자 좋을 건 없겠지..


설마 치어릴리 선생님의 청소년 버전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하긴, 트릭시랑 트와일라잇이 여전히 망아지인 점을 미루어보아 인간 세상에서 갓 성년이 된 사람은 여기서는 십대쯤 되어야지 정상일 것이다. 좀 더 나이를 먹은 어른은 아마도 여기선 선셋과 동갑내기일 테고..


인간 세상에서 치어릴리 선생님은 선셋이 무지개 광선을 쳐 맞고 개심하기 전에도 내심 꽤 좋아하던 몇 안 돼는 선생님 중 하나였다. 도서관 사서도 겸했던 치어릴리 선생님은 한참 악명을 떨치던 선셋과 1:1로 대면해도 '아휴.. 골칫덩이 납시셨구먼.' 라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리 친절하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저기.."


존대를 하면 오히려 어색하겠군... 분위기 파악이 대충 끝난 선셋은 말을 이었다.


"길을 잃어서 그러는데, 교장실이 어디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 오늘 전학 와서 내가 여기 길을 잘 몰라."


치어릴리는 네 발로 일어났다. 잠시 선셋을 살펴보며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는 눈치였다.


"ㄴ..네.. 근데 잠깐만 기다려주실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까지 제출할 노트를 꺼내야 하거든..요... 아직 덜 끝내서 쓰기도 해야 하고... 어디보자.. 이게... 분명 여기에 넣어놨는데..."


사물함에 넣어두면 나중에 행방불명이 되는 물건들이 꼭 있다니까. 아! 이 학교생활의 사소한 곤란함마저도 얼마나 그리웠는지.. 이제 마법도 맘대로 쓸 수 있으니 오히려 더 좋겠군!


"도와줄까?"


선셋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는 정리 안 된 사물함 안에 있는 책들과 학용품들을 마법으로 다 꺼내 공중에 좌르르륵 펼쳐놓았다.


"이제 찾기 좀 쉽겠지?"


치어릴리는 몇 초간 두런거리다가, 필요한 노트를 찾아 입으로 앙 잡은 뒤 땅으로 내려놓았다. 볼 일이 끝나자 치어릴리는 활짝 웃으며 선셋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선셋은 꺼내둔 학용품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다시 치어릴리의 사물함에 넣어두었다.


"그럼.. 따라오세요."


치어릴리가 향한 곳은 A구역이 아닌 C구역이었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는지, 5발짝ㄷ 채 가기 전에 치어릴리는 문득 선셋을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공주님 성함이.. 선셋 쉬머. 맞으시죠?"


'요즘 세상에 흔치 않은 신문을 보는 고등학생이로군..' 선셋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그냥 선셋이야. 대관식도 안 올렸으니까. 존댓말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불러. 괜찮으니까. 물론 이번 달 말에 정식 즉위식을 가질 예정이긴 한데.. 그래도 난 포니들이 나한테 정중하게 대하고 그러면 좀 부담스럽더라고."


물론 대관식은 더 일찍 열 수도 있긴 했지만, 어머니는 선셋에게 평범한 포니의 삶을 누릴 시간을 더 주기로 했었다.


아니, 이건 그냥 내 생각인가.. 선셋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머니의 부름에 이끌려 이미지 회복 명목으로 20번이 넘는 언론사 인터뷰에서 수많은 질문을 받고 나니, 과연 신경이나 쓰고 계신건지 약간 의문이 들었던 차였다.


어찌됐든 치어릴리는 약간 흥미가 동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이어갔다. "아.. 음, 그럼 이 학교엔 어쩌다 오게 된 거야?"


기자들의 질문과는 달리, 이건 즐겁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도피처가 필요했달까.. 저번 주 토요일 날 난리를 겪고 나서, 공주라는 사회적 위치에 구애받지 않고 나를 있는 그대로 봐 줄 포니들과 만나고 싶었거든. 정치병 환자들은 이제 신물이 날 정도라.."


치어릴리와 트릭시의 좀 더 어린 버전을 만나고 나니 문득 선셋에게 드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인간 세상에서 사귀었던 다섯 친구들도 이퀘스트리아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이래선 안 된다. 걔네들 입장에선 선셋 쉬머는 아직 생판 남일게 분명하니까. 일부로 만나러 가 봤자 곤란한 일들만 생길게 뻔하고..


'게다가 기껏해야 아직 어린 망아지들일 텐데..' 그리운 심정을 애써 감추며 선셋은 치어릴리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어갔다. 체육관 방향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선셋은 또 한 번 생각에 잠겼다. 만약 이퀘스트리아의 포니들이 인간 세상의 또 다른 자기 자신보다 더 어리다면.. 캔틀롯 고등학교에 오래 재직 중이었던 크랭키 선생님도 여기 있는걸까? 체육교사 벌크 바이셉스도? 셀레스티아 교장은... 어... 조금 앞뒤가 안 맞는 대칭이었다. 일개 학교의 교장 선생과, 한 나라를 다스리는 불멸의 삶을 가진 공주라.. 잠깐. 그렇다면 루나 교감은 또 뭔가? 어머니는 분명 여동생 따윈 없었는데.. 그렇다는 건 이 캔틀롯 고교엔 십대 버전의 루나가 재학 중이란 이야긴가? 아니면 루나 혼자만 이 두 평행세계에서 예외로 한 세상에만 존재하는 인물이란 건가? 어쩌면 여기선 루나가 이 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자. 다 왔어."


교장실은 학교 맨 깊숙한 곳, 학교 정문의 정 반대쪽에 있었다. 거기서 몇 발자국만 가면 체육관으로 가는 문이었다.


"고마워 치어릴리."


고개를 끄덕이며 선셋은 대답했다. 치어릴리는 이제 제 갈 길을 가려고 했지만, 선셋이 갑자기 날개로 치어릴리의 앞길을 막았다.


"잠깐만.. 음.. 저기, 내가 여기 처음 전학 와서 잘 아는 포니도 별로 없어서 하는 이야긴데.. 있다가 점심 같이 먹지 않을래?"


잠시 동안 치어릴리는 뿔이 두 개 돋아난 알리콘을 보는 양, 선셋을 쳐다보았다.


"점심을...? 나랑?"


"그럼."


치어릴리의 이상한 포니 보는 듯한 눈빛은 일단 무시하고, 어께를 으쓱하며 선셋은 대답했다. 인간 세상의 경험으로 미루어볼때 이런 포니와 어울리는 건 선셋의 소위 '가오'에 흠이 가는 일이었지만 지금 선셋은 그딴 것 따윈 쥐뿔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 배운 게 또 한 가지 있었다. 쌍놈or년 소리 듣는 포니가 얼굴이 반반하면, 오히려 학교 내 사회적 지위는 더 높아진다는 것. 여기도 똑같았다. 샤이닝 아머가 꽤 잘생기기는 했으나, 너무 상냥한 게 오히려 발목을 잡는 바람에 여기저기에서 호구취급당하지 않았던가? 정말 고등학교는 어느 세상을 가도 똑같나보군.. 선셋은 약간 안심이 됐다..


"좋아!" 치어릴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선셋 공주.. 아니, 선셋! 점심때 봐!"


이제 치어릴리도 제 수업을 들으러 갔겠다, 선셋은 교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문 쪽의 소파 위엔 캐이댄스가 배를 깔고 누워있었고, 반대편의 책상엔 직급이 꽤 높아 보이는 포니 하나가 앉아있었다. 유니콘 학교의 교장실과 거의 판박이인 구조였다.


"왜 이제야 온 거야?"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캐이댄스가 따졌다. 선셋은 약간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다.


"걸어오느라 그랬다 왜? 길 알려줄 생각도 않고 훨훨 날아가 버린 주제에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이렇게 받아친 뒤 선셋은 히죽 웃었다. 실없는 소리를 해서 맥을 깨트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좀 기다리지 그랬어? 설마 지각하는 게 변신충보다 더 무서웠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캐이댄스의 얼굴이 순간 공포로 창백해졌다. 이런.. 이건 좀 너무했나?


"미안."

"미안."


둘은 동시에 사과했다. 곧, 멋쩍은 웃음도 동시에 터뜨렸다.


선셋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흠! 그러니까.. 전학 수속은 어디에서 끝마치면 돼지?"


"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이제 캐이댄스는 선셋이 아까 한 심한 말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서류 수속은 진작 이모님이 다 끝내놓으셨어. 있다가 신치 교장이랑 약간의 면담 후에, 2교시쯤 조회에 참석하기만 하면 돼..... 저... 선셋? 갑자기 왜 그래?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어?"


치솟는 용암과도 같은 분노가 선셋의 속에서 터지기 직전이었다. 다행히 꾹 억누를 수 있어서 망정이었지..


'왜 하필! 왜 하필 걸려도! 젠장! 씨발!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저... 선셋.. 왜 갑자기 으르렁거리는..."


못 억눌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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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어떻게 나이를 먹어 가는지에 관해 선셋이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눈앞의 신치 교장은 거울 저 편의 신치 교장에 비하면 무지 젊어 보였다. 하긴 당연한 건가? 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포니들은 인간세상보다 나이를 한 10살 정도는 덜 먹고 나왔는데 신치라고 예외는 아니겠지. 그래도 교직에 몸 담은 지 꽤 되는 사람/포니였나 보군..


이제 선셋은 강당 위의 연설대 위에 우두커니 서서 속물 중의 속물인 교장선생이 지루한 연설을 끝마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교장의 큐티마크는 이어보면 어떤 모양이 되는 별자리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그게 별자리인지 왕점 떼거리인지 알 게 뭔가? 말본새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분석하면 저 신치는 분명 거울 저 편의 신치 교장과 같은 유형의 포니였다. 인간 트와일라잇을 계속 부추겨 차원을 붕괴시킬 뻔한 그 사람과 말이다. 선셋은 이미 저 교장 선생을 진심으로 싫어하고 있었다.


"캔틀롯 고등학교의 학생 여러분,"


망할, 그냥 들어도 혐오스러운 목소린데, 마이크까지 쓰다니... 선셋은 겨우 표정관리를 하며 자리를 지켰다.


"다들 입을 모아 말들을 하더군요. 우리 학교는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유니콘 학교에 합격하지 못한 실패자들이나, 혹은 불운하게도 뿔을 못 달고 태어난 포니가 어쩔 수 없이 다니는 학교일뿐이라고.."


'지금 장난까잔 것도 아니고..' 선셋은 한 쪽 눈썹을 올리며 신치의 뒤통수에 지그시 불신의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객석의 캐이댄스도 그냥 어께만 으쓱 하고 넘겼으므로, 아까 신치의 발언 따윈 신경 끄고 선셋은 혹시 인간 세상에서 봤던 다른 포니는 없나 하고 앞에 앉은 다른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물론 학생 수는 많았고, 또 제대로 얼굴들을 볼 수 없었으므로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는 힘이 들었다. 희한하게도 학생들의 종족 비율은 1:1:1로 대체로 비슷했다. 캔틀롯이 이퀘스트리아 유니콘 마구의 3분의 1이 거주하는 곳이란 걸 생각해보면 이례적인 일이였다.


"하지만! 이 교장 선생님이 2년 동안 재직하면서 학교의 평판을 올리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고, 또 정부로부터의 교육 지원을 적극적으로 끌어오기도 하고, 학교 폴로 팀의 성적을 전국 일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결과가 드디어 결실을 맺는군요. 새로 오신 공주님이 전에 다니던 학교는 재쳐두고 우리 학교로 전학을 다 오지 않았습니까? 


캐이댄스 공주님 때가 생각나는군요. 다른 포니들이 이건 사기라느니, 문서가 잘못된 거라느니, 분명 1주일도 안 되서 다시 전학을 갈 거라느니 시기심 어린 말들을 내뱉었지만.. 한번 비웃어줍시다. 하!"


교장은 힘차게 선셋을 앞발로 가리켰다. 스포트라이트가 선셋에게 집중되었다.


"바로 그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수제자분이 직접 이 학교로 전학을 오지 않았습니까? 언제나 유니콘 학교 성적 최상위를 차지하던 그 포니가 말이죠. 이게 소위 명문 학교라고 자처하는 그 곳의 교육이 공주님에게는 영 불만족스러웠다는 반증 아니겠습니까?"


'인간 신치도 저 따위로 역겨웠던가?' 속으로 신치의 험담을 하고 있던 선셋은 갑자기 신치가 자신을 돌아보자 잠깐 두 눈을 깜빡거렸다.


"자. 그럼, 선셋 쉬머 공주님."


엄청난 자부심과 비굴함이 동시에 섞인 목소리였다. 하긴, 인간 세상에서도 명예욕 빼면 시체인 미친년이었으니, 명예욕 보증수표인 알리콘에 대해선 저자세를 취하는 게 저 포니 입장에선 맞는 일이겠지.


"학생들 앞에서 좋은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극한 불편함을 숨기려고 노력하며, 선셋은 앞으로 나왔다. 당초 이 학교에 자신을 과시하려고 온 것도 아닌데, 어쩐지 일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캐이댄스도 똑같은 일을 겪었을까?'


선셋은 마냥 궁금해 하며 마이크 앞에 섰다. 신치 교장과의 신장 차이 때문에 마법으로 마이크를 약간 올릴 필요가 있었다.


"모두 안녕하세요."


선셋은 다음엔 무슨 말을 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공주라고 특별 취급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신치 교장에게 네 욕망 채워주려고 온 것은 아니니 엄한 생각하지 마라는 말을 완곡하게 돌려서 말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냥 본래 성질대로 직설적으로 말할까? 혹은 미친 듯이 웃으며 나는 국가의 힘을 등에 업고 있으니 대들 생각하지 마라고-


'아니 왜 뜬금없이 예전의 나나 할 생각을.. 윽... 어디서 뇌라도 다친 건가..'


"... 여러분도 알다시피, 보통 포니들은 뿔과 이 날개를 동시에 달고 있는 포니들을 아주 어려워하죠..."


선셋은 서서히 등에 달린 날개를 펼친 다음 학생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몇몇 포니들이 그러는 걸 제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고요.."


선셋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바깥세상의 서운했던 점을 학교까지 끌어오기는 싫었지만..


"물론 제가 지금 공주는 맞지만, 아직 제가 지금 가진 권한이라 봤자 그냥 뿔과 날개 동시 착용이 허용된 것 밖에는 없거든요."


학생들 사이에서 짧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전 저를 다른 포니들과 다르다고 멋대로 착각하는 그런 멍청한 포니는 아니에요. 나한테 아부하는 소리 몇 마디 듣자고 여기로 전학 온 건 결코 아니고요."


선셋의 목소리에 점점 자신감이 실렸다. 아까보다 말이 더 쉽게 나왔다. 선셋의 마음속에 있던 전원 버튼이.. 마침내 켜진 기분이 들었다.


"제가 여기로 전학 온 건 이 학교에서 특별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교육 과정 때문은 아니고, 스포츠 팀 때문도 아니며, 학교 시설 때문도 아니에요. 무엇보다 전 오직 여러분. 즉,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 여러분들을 보고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여러분을 가까운 곳에서 보고, 만나기 위해서요. 그러니까 여러분.. 같이 좋은 친구가 되어 봐요!"


오그라든다면 오그라든다고 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바보 같기도 했고, 연설의 내용 만으로만 따지자면 멋스러움도 부족했다. 하지만 선셋은 당당했다. 자랑스러웠다. 이게 절대로 맞는 길이었다.


한동안 우울했던 기분도, 이 연설을 기점으로 꽤 나아지기도 했고 말이다.


"우와! 저것 봐!"


"화..."


예기치 못한 청중의 탄성에 선셋은 멀뚱히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곧, 우레와 같은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고, 선셋은 그걸 뒤로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신치 교장은 바로 마이크를 잡고 해산을 선언했다.


무대에서 내려오자 캐이댄스가 씩 웃으며 선셋을 맞았다.


"하여간, 자랑을 못 해서 안달을 내요.."


그 말엔 아무런 악의도 없었지만, 도대체 뭘 보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몰라 선셋은 당혹스러웠다.


"어..엉?"


"아까침 갈기가 빛난 거 보고 하는 말이야. 솔직히, 꽤 멋졌어. 비록 몇 초뿐이지만 이모님 같아 보이던걸?"


선셋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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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다시 찾은 고등학교 생활은.... 지루했다. 점심시간이 오기 전에 들은 수업 2개는 이퀘스트리아에 오기 전에 들었던 학교 수업과 인간 세계의 학교 수업의 복습 수준이었고, 점심시간 후에 곧 듣게 될 역사 수업은 그나마 유니콘 학교의 수업과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어느 학교를 막론하고 역사책의 이야기들은 어머니가 직접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에 비하면 잘 꾸며낸 동화 같은 이야기들뿐이었다.


지금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만나게 될 다른 포니들에 대한 기대가 선셋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선셋 공주님! 무슨 동아리 드실 거예요?"


"치어리딩 부 드실래요? 선셋 공주님?"


"...마법 동호회는..."


"...수영 동아리는..."


"...퀴디치 어때요! 어... 페가수스들이랑요."


예전 같았으면 쏟아지는 관심에 제 잘난 줄 알고 득의양양했겠지만, 웬걸 부끄러운 홍조만이 선셋의 얼굴을 채웠다. 어쨌든 선셋은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며 달려든 포니들을 향해 정중한 거절의 말을 잊지 않았다.


"미안. 여기 온지 얼마 안 돼서 당분간은 학교 모든 곳을 다 둘러보고 싶은데.. 혹시 나중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꼭 알려줄게. 알았지?"


교내식당 입구에 다다르자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는 유니콘 세 필이 선셋의 시선에 들어왔다. 어떤 학생들도 그 포니들 주변에는 범접할 엄두를 내지 않았다. 마력으로 역장을 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 집단의 리더 격으로 보이는 포니는 꽤나 장신의 암말이었다. 우수한 부모로부터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받고 태어난 데에 더해 특별 미용 관리 연금술로 관리를 받은 듯 한 그 흰색 털가죽에 긴 분홍색 갈기를 한 암말은 선셋으로 하여금 공주 자리에 오르기 전의 어머니의 모습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그룹의 두 번째 포니는 리더에 비하면 키는 약간 작았고, 청색 털가죽에 그... 약간 무지개 스러운 빛깔의 갈기를 달고 있었다. 세 번째 포니는 다른 둘보다는 키가 작았고 노란색 털가죽에 연보라색 갈기를 달고 있었다.


"안녕하신지요 선셋 쉬머 공주님."


거드름을 잔뜩 부린 프랑스 억양을 쓰며 목례를 하는 그 포니의 말에 선셋은 하마터면 표정 관리를 못 할 뻔 했다. 물론 언젠가는 선셋도 자신에게 굽실거리는 포니들을 상대하는데 익숙해지기야 할 테지만, 자격도 없는 자리에 앉은 공주에게 땅바닥에 거의 얼굴을 처박고 굽실굽실하는 걸 보자니 역시 버티기가 힘들었다.


"플뢰르 드 리라 하옵니다 공주님. 그리고 이 둘은 제 친구, 새시 새들이랑 어퍼 크러스트라고 하지요. 제가.. 어흠! 그러니까 캔틀롯 고등학교의 공주 비슷한 입장으로써 공주님께 학교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를 드릴까 하는데, 잠시 개마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으신가요?"


선셋은 식당에 모인 다른 학생들과 그 집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학교 인지도 탑급에 속해있는 포니들 치곤 뭐, 그렇게 나쁜 포니들처럼 보이진 않는군..


"그럴까 그럼?... 근데 점심도 먹어야 하니까 점심시간 끝나기 전까지 끝내줬으면 좋겠는데 말야."


또 한 번의 목례. "알겠사와요 공주님." 플뢰르는 복도에 모여 있는 포니들을 향해 비키라는 듯 발짓을 하며 말했다.


"가실까요?"


...아직 뭐라 하긴 좀 어렵군. 선셋은 셋의 뒤를 따라 학교에서 가장 큰 창문이 달린 복도를 걸어가 마침내 구석의 조그마한 빈 교실 앞에 다다랐다. 개마적인 이야기를 하기엔 너무 개방되어있는 공간이었지만, 저 그룹의 교내 지위를 생각해 볼 때, 저 셋이 들어가 있는데 다른 포니들이 함부로 들어올 일은 없을 것 같았으므로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점심때 줄 설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거에요 공주님." 새시 새들의 말이었다.


"그럼요. 공주님이 먼저 드시겠다는데 누가 감히 뭐라고 하겠나요?" 어퍼 크러스트가 거들었다.


그 두 마디를 듣자마자 선셋의 인내심은 빠르게 바닥나기 시작했다.


"저기, 남 걱정은 됐고, 빨리 하고 싶은 말이나 해."


너무 대놓고 적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건 별로 안 좋을 것 같아, 선셋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배고파서 그래."


플뢰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사와요 공주님. 물론 공주님께선 캔틀롯 출신이라 별로 필요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공주님의 명성에 혹여 누가 되지 않게끔 저희가 학교에서 공주님을 보좌해 드릴게요. 전에 캐이댄스 공주님에게 했었던 것처럼요."


"아아. 가엾은 캐이댄스 공주님.." 어퍼 크러스트는 사뭇 슬프다는 듯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지만, 거기엔 미묘하게 조롱하는 어조가 섞여 들어가 있었다.


"비록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조카이긴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공주라는 분이 그렇게 소통하는 기술이 부족해서야 쓰겠나요? 최근엔 최하 중 최하의 포니와 교제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리지 뭐에요?"


새시가 키득거리며 그 말을 받았다. "음.. 아주 좋게 말해주자면.. 마정이 많다고 해야 될까요?"


"세상에, 마정도 정도가 있어야지요! 폴로부 주장이 캐이댄스 공주님에게 열렬히 구애하는 통에 떨거지들이 다 떨어진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에-"


열심히 재잘거리는 친구의 입을 플뢰르가 막았다. 선셋의 표정은 마치 '내가 뒷발로 걷어 차 건물에서 떨어트려야지 저년이 입을 닥치려나.' 라는 표정이었다. 말리는 포니가 없으면 그대로 저지를 기세였고.


"아..저.. 죄송합니다. 제 친구가 채신머리가 없었네요.. 본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저희가 학교의 상위 사교 집단들을 쭉 소개해 드릴게요. 다만 공주님이 혼자가 더 편하시다면.. 캐이댄스 공주님 때처럼 다른 포니들에게 절대로 방해하지 않도록 말을 잘 해놓을게요."


선셋이 그딴 거지발싸개 같은 제안 따윈 집어치우고 당장 꺼지라고 응수를 해 주려는 찰나, 한 어스포니 암말이 선셋을 보고 교실 안으로 걸어왔다.


"선셋! 여기있었구나!"


치어릴리였다. 선셋이 뭐라 인사를 하기도 전에 새시와 어퍼 크러스트가 먼저 치어릴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치어릴리. 지금 선셋 공주님은 너~무 바쁘셔서 널 상대해줄 시간이 없거든." 어퍼 크러스트가 경멸조로 말했다.


"혹시나 내 친구나 너무 상냥하게 말해서 잘 이해를 못 했을까봐 다시 제대로 말해주는건데, 너 따위가 감히 선셋 쉬머 공주님에게 아는 척을 해? 주제를 알아야지! 알았으면 여기에서 공기낭비 하지 말고 가서 어스포니면 어스포니답게 나무나 심던지 해. 너희들이 제일 잘하는 게 그런 거 아냐?"


어퍼 크러스트는 콧방귀를 뀌며 치어릴리가 누 눈동자에 눈물을 머금고 돌아설 정도로 매섭게 쏘아붙였다.


치어릴리가 눈앞의 두 암말에게 개 내쫒듯 내쫒기는 모습을 보자 선셋의 한 쪽 눈은 치솟는 분노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단 말해둘 게 있는데.."


선셋은 두 암말 바로 뒤로 걸어와 두 앞발굽으로 가볍게 그 둘을 좌우로 밀치며 말을 이었다.


"니들이 나야? 나대신 말을 다 해주고 자빠졌네. 됐으니까 시키지도 않은 대변마 노릇은 그만 좀 하지?"


그리고 뒤로 돌며 두 떨거지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는 플뢰르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너, 네가 존나 거만하고, 너보다 낮아 보이는 것들은 일단 깔봐야지 직성이 풀리는 포니라는 것. 아주 잘 알겠어. 네 딴엔 내게 친절을 베풀어준답시고 이러는 모양인데.."


선셋은 표정을 인상을 약간 구겼다. 말투는 반쯤 협박하는 어조로 변해있었다.


"일단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겠어. 하지만, 네가 또 나한테 다가오는 포니를 네 멋대로 쫒아냈다간.. 앙상히 뼈만 남은 네 몸뚱이를 곱게 접어다가 사물함에다가 처박아놓은 뒤 오직 어머니만 풀 수 있는 주문으로 영영 잠가버릴 줄 알아!"


플뢰르의 표정은 순간 경직되었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선셋은 치어릴리를 한 쪽 날개로 감싸며 말했다.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아..알겠습니다! 공주님." 새파랗게 겁에 질린 세 필의 암말은 동시에 입을 모아 대답했다.


"잘됐네. 그럼.."


선셋은 한 번 고개를 끄덕인 뒤, 날개로 감싸고 있는 어스포니를 돌아보았다.


"치어릴리. 점심 먹으러 가자.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얘들이랑 캐이댄스도 소개시켜줄게."


나무 과분한 관심을 받고 있단 생각에 치어릴리는 목소리 하나 제대로 낼 수 없었다. 


"고..고맙...고맙습니다 공주님."


"편하게 부르라고 했잖아."


점잖게 타이르며 선셋은 다시 교내 식당으로 향했다.


"거기서 제일 맛있는 게 뭐야? 배고파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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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종말이 다가올 징조였다.


분명 어디에선가 먼지가 두툼히 쌓인 채로 잊힌 세상의 종말을 예견한 예언서에 '세상의 순리가 뒤집히는 날, 공주가 덕후와 같이 점심을 먹는 날, 세상은 아작날 것이로다!' 라는 예언이 적혀있는게 분명했다. 실제로 샤이닝 아머는 지금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만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여기는 교내 식당. 두 필의 공주가 샤이닝 아머의 양 옆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근처를 지나가는 수 백 필의 남학생들이 샤이닝 아머를 죽일 놈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저 편에 앉아있는 세 필의 수말은 이게 말이 되냐고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성 정체성이 확고한 일부 암말들이 샤이닝 아머를 째려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샤이닝 아머의 왼편엔 이 학교에서 최고로 예쁜, 그리고 이퀘스트리아 서열로만 따지자면 탑 5안에 들어가는 캐이댄스 공주가 앉아있었다. 언제나 친절하고 또 상냥한...은 아니군, 샤이닝 아머는 저 예쁘장한 공주님이 수틀리면 무서운 맹수로 돌변할 수 있다는 걸 직접 겪어봐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새로 즉위한 공주 : 선셋 쉬머가 앉아있었다. 캐이댄스 같은 정석적인 미마는 아니지만, 캐이댄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멋스러움을 선셋은 갖추고 있었다. 적극성, 대담함, 선셋의 이 모든 면모를 샤이닝 아머는 동경했다. 캐이댄스의 미모처럼 단순히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뭐 생각하는 거라도 있어 샤이닝?"


2번째 샐러드 접시를 말끔히 비우며 캐이댄스가 물었다. 전에 레스토랑에서 먹어치운 양이랑 비교하면 이건 엄청나게 적게 먹고 있는 거였다.


샤이닝 아머는 몸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누가 봐도 억지로 지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캐이댄스 공주를 돌아보았다.


"아! 아무것도 아냐 캐이댄스.."


그리고 자기 몫의 점심을 내려 보며 또 물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우리랑 같이 밥을 먹는 건지.. 보통 옥상에서 먹지 않았어?"


캐이댄스는 약간 상심한 표정이었다. "방해했다면 미안.. 그게.."


"내가 끌고 왔는데 불만이라도?"


선셋은 캐이댄스를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뭐? 옥상? 날개가 있으니 쉽게 갈 수 있다곤 해도 외톨이처럼 옥상에서 혼자 점심이라니.."


캐이댄스는 더 주눅이 드는 대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선셋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이구, 지도 힘을 얻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서 다른 포니들을 멀리했던 주제에 남말 하고 있네. 불과 2주 전만 해도 네 친구가 몇 필이나 있었더라?"


"하하.. 음.. 이거, 할말 없군."


두 친구간의 장난스런 말다툼이 한 차례 오가고 다시 같은 식탁에 앉은 7필의 포니들 사이엔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다시 대화의 물고를 튼 건 포인덱스터였다. 선셋 옆에 앉아있는 치어릴리에게 말을 걸며 말이다.


"저... 치어릴리라고 했던감? 선셋 공주와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인지?"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잘 몰랐었는데 그게.. 오늘 갑자기 선셋이 와서 교장실이 어딘지 알려주라고 하신 뒤 갑자기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더라고. 저.. 네 이름이 포인덱스터 맞지? 선셋이 너희랑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암말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줘서 기뻤는지 포인덱스터의 표정엔 감출 수 없는 우쭐한 기색이 감돌았다. 포인덱스터는 치어릴리의 말에 대답해주려고 했지만 선셋이 불쑥 건조한 톤으로 끼어드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쟤네들이랑은 토요일 샤이닝네 집에서 만났는데. 기절한 나랑 샤이닝이랑 둘만 남기고 죄다 도망가 버렸데? 덕분에 그렇고 그런 일이 좀 있었지."


샤이닝 아머의 두 볼이 상기되었다.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발언을 일부로 하는 걸 볼 때 선셋은 아마도 다른 포니들에게-


"선셋!" 캐이댄스가 동료 알리콘을 버럭 꾸짖었다.


샤이닝도 놀랐지만, 선셋도 더 깜짝 놀란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쪼그라들며 선셋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미안... 사람.. 아니, 포니가 참.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미안 샤이니. 내가 좀 음... 생각도 않고 지껄일 때가 종종 있거든.."


선셋이 자기 뺨의 홍조를 눈치 채지 않기만을 바라며 샤이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샤이닝이라고 선셋에게 음탕한 생각을 안 품었던 건 물론 아니다. 뚜렷이 생각할 수 있는 지성이 있는 포니라면 자기 두 앞발을 거는 한이 있어도 공주님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고들 싶겠지. 하지만.. 그러기엔 캐이댄스가 선셋에 관해 말해준 게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그리고 선셋의 멋진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결과 오히려 자기가 자격이 있나 하는 자괴감만 커져갈 뿐이었다.


그리고 선셋과 트와일라잇이 처음 만난 날.. 그 때부터 선셋은 트와일라잇을 과도하게 신경 쓰기 시작했다 샤이닝은 그 점이 약간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캐이댄스의 말처럼, 선셋은 자기가 신경을 쓸 만한 다른 포니를 벌써 찾아버린 건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약간 들었다.


아니 그래도, 아무리 동생이라도 그렇지, 작작좀 선셋 옆에 붙어있을 것이지. 이런 젠장맞을!


"아휴.. 어쨌든 미안.."


선셋은 긴 한숨을 쉬며 텅텅 비운 자신의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난 동아리나 알아보러 가야겠다. 그럼 있다가 집에 갈 때 같이 가자. 알았지? 샤이닝?"


"?... 같이? 왜?"


뻔한걸 왜 물어보냐는 듯 선셋은 인상을 약간 찌푸렸지만, 여전히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띄어져 있었다.


"트와일라잇에게 직접 마법을 가르쳐 줄 건데, 너희 부모님에게 먼저 허락을 받아야 될 것 같아서."


라고 말하고선 선셋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좀 있다 정문에서 보자."


샤이닝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선셋은 빠르게 교내 식당을 나갔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샤이닝은 비록 반 강제긴 했지만, 상황과 때에 맞는 연애상담을 해 주던 공주님을 쳐다보며 가장 하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내가.. 잘못한 거 있나?"


선셋의 뒤꽁무니를 보던 캐이댄스는 동정하는 미소를 지으며 샤이닝 아머를 돌아보았다.


"아니, 선셋이 요사이 여러 가지 심정이 복잡한 거뿐이지 뭐."


염동력으로 빈 접시들을 들며 캐이댄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가자. 선셋에게 모든 게 잘 풀릴 거라고 해줘야지."


샤이닝 아머는 순순히 남은 음식을 빠르게 해치우고 캐이댄스의 뒤를 따랐다.


그 뒷모습을 보며 샤이닝 아머의 친구들은 서로 한 마디씩 속삭였다.


"이쯤 되니까 내가 대체 왜 샤이닝 쟬 부러워했는지 모르겠다.." 8비트의 평이었다.


"웃기네. 부러워만 했냐? 질투로 눈이 뒤집혔다면 또 모를까. 안 그러냐? 포인덱스터?" 가퍼가 덧붙였다.


하지만 포인덱스터는 둘의 말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같은 식탁에 앉은 암말 한 필을 (제 딴에는)그윽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을 뿐.


"어흠... 자네도 교정기를 끼고 있구먼.. 우리 둘...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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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다크 소울 3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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